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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世 충열공 이대원장군 (忠烈公 李大源) - 성근진사공

 

이대원장군 해전도

 

  • 生  卒 : 1566 3. 7 ~ 1587. (66세)

  • 墓  所 : 경기도 평택시

  • 略  曆  

∙ 이대원 장군은 1566년 병인년 3월 7일(조선 명종 21년) 포승면 희곡리 194번지에서 부친 이춘방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자는 호연(浩然)이다. 함평이씨 시조의15세손이며 진사공(進士公) 휘(諱)성근(成根) 할아버지의 고손(高孫)이 된다.

∙ 1583년 (조선 선조 16년) 4월 18세의 어린 나이에 본래 문신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무과에 응시, 당당히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등과(登科) 하였고,

∙ 3년후 21세 되던 해에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전라도 고흥 반도지방의 녹도만호(鹿島萬戶 : 從四品)가 되었다.

∙ 나이 22세가 되던 1587년 (선조20년 -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전) 2월에 호남지방에 왜구가 수시로 나타나 양민을 괴롭히자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 앞바다 손죽도 인근 해상에 침공한 왜구 20여척을 대파(大破)하였다.

∙ 그때 그의 직속상관으로 있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조선시대 각 도의 水軍을 총지휘하던 正3品의 외직무관) 심암(沈岩)은 그의 전공을 빼앗으려다 이장군이 듣지 않아 창피만 당하게 되어 원한을 품게 되었다.

∙ 그 후 며칠 뒤인 2월 17일경에 또다시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으로 쳐들어 오자 심암은 이장군에게 무조건 출전명령을 내리었다. 이에 장군은 청하기를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명일에 진격하자"하였으나 심암은 피로한 병졸 백여명을 이장군에게 주며 끝내 독촉하여 적과 싸우게 하니 이장군은 할 수 없이 명령에 의하여 출전 할 수 밖에 없었다.

∙ 2월 17일 병사 일백여명을 이끌고 손죽도 해상에 출전한 장군은 용전분투(勇戰奮鬪) 적과 맹렬히 싸웠으나, 병력숫자로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저히 싸울 수가 없어 본영(本營)에 구원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만 클 뿐 당할 도리가 없어 대세를 각오한 이장군은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절명시를 써서 수병(水兵) 孫大男에게 이 적삼을 나의 가족에게 전달하라고 명하여 손대남은 장군의 애마(愛馬)를 타고 고향근처에와 속적삼을 말에게 물려 보내고 수병은 되돌아가고 애마는  눈물을 흘리며 적삼을 가족에게 전달하고 곧 바로 죽었다고 한다.

 

절명시(絶命詩)0

日暮轅門渡海來(일모원문도해래)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 건너오니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군사는 외롭고 힘이 없어 죽으니 슬프도다

君親恩義俱無報 (군친은의구무보)임금님과 부모님께 충효를 보답하지 못하니

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결불개)한스러움과 먹구름이 엉켜 끝내풀길이 없네

 

충마총

∙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알고 속적삼을 고향 대덕산 밑에 묻어 장사를 지냈으니, 그곳이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에 위치한 장군의 무덤인 것이다.

또한 장군의 애마가 죽어 장군묘지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매장 말 무덤(忠馬塚)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 장군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은 전국에 걸쳐 4군데가 있으니,

확충사 이대원장군 동상

 ① 평택 확충사(䨥忠祠)

     경기도 문화재등록  제56호(1980. 6. 2)

     제향일(祭享日) : 양력 3월28일

 

고흥쌍충사

② 고흥 쌍충사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 2202번지

  忠烈公 李大源 (1566~1587)장군만 모셨다가  1593년에 忠壯公 鄭運(1943-1593)장군과 함께 배향한 사우(祠宇)로 선조께서는 고흥 녹동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한편, 함께 배향되어 있는 충장공 정운 역시 수군장수로서 1591년 이대원장군 다음으로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부산 몰운대에서 1593년 순절 (당시 나이 54세) 하셨다.

 근대에 이르러 1942년 日人에 의해 빈터가 되었다가, 1947년(순국360년) 해방후 이장군 순국 6주갑(360년)이 되는 해에 '녹도쌍충사 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현 신실과 강당을 다시 개축하였다.

제향일(祭享日)은 매년 4월 30일 (2009.4.30 충렬공 影幀 奉安式 行事를 擧行함) 奉祀主催: 慕忠會:鄕校儒林

 

③ 손죽도(巽竹島) 충렬사(忠烈祠) 문화재  239호

손죽도 이대원장군 동상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1164번지

 손죽도는 장군의 전사 이후 크게 손해본 섬이라고하여 손대도(損大島)라고도 불렀다.

장군이 손죽도 해상에서 순국하자 손죽도 마을 주민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마을 남쪽 뚝박골에 장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초가로 얽어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 지내며 두세번의 중수를 거듭하면서 면면히 이어오다가 1983년, 또 다시 사우가 퇴락하자 마을주민의 정성으로 이를 중수하고 여천군으로 부터 충열사라는 사액을 받아 현판하였다.

그후 충열사가 2003년 전남 문화재로 등록되어 도비 1억원을 받아 여수시청에서 2004년에 중건하였다.

손죽도 주민은 장군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1주일 전 사당 주위에 인줄 (부정을 막기 위해 길이나 문에 건너질러 매는 금줄)을 띠고 집집마다 개를 매어놓아 개와 사람이 일절 통행을 금지시키고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부부생활도 금하며 식수는 새벽에 약수터에서 길어다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였다. 매년 집집마다 쌀1되씩 공납시켜 엄숙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향일(祭享日) : 매년 음력 3월 3일

 

④ 여수 영당(影堂, 影堂址)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 30-4번지 돌산 어항센타 (전남 지방문화재 제6호)여수시 남산동 (현 돌산대교 서쪽 입구)에 영당이 있었는데 여수지방의 해신당(海神堂)으로 어민들의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전까지는 고려말 충신 최영장군을 배향하여 왔으나 임진왜란 후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이대원장군, 정운장군등 3위를 추가 배향하였다고 한다. 세 장군을 추후 초혼하여 배향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세 장군이 남해안 바다를 지키던 영장이라, 이 지방 유림에 의해 해신(海神)으로 영당에 모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출어하는 어선들은 반드시 고사미 2말씩을 공납하고 무사안전 항해를 기원한 후 출어했다고 하며,

지금도 매년 5월 6일~7일중 기상관상대에 문의하여 비가 오지 않는 날로 택일하여 풍어굿으로 四장군(최영, 이대원,이순신,정운)에게 제사를 지낸다.